● 국경일! ‘단기 4356년 개천절’
국경일은 국가적으로 기억해야 하는 경사스러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법적으로 지정한 날을 뜻한다. 우리나라의 5대 국경일은 ‘개천절, 3·1절, 광복절, 한글날, 제헌절’이다.
지난 10월 3일 하늘을 열었다는 단기 4356년 개천절(開天節, National Foundation Day)은 대한민국의 국경일 중 하나로,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고조선(古朝鮮)을 처음 건국한 것을 기념하는 한민족 고유의 명절이자 기념일이다. 원래는 음력 10월 3일이었다. 이날에는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를 게양한다.
이 날은 하늘 앞에 자신을 돌아보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이치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라는 고조선의 시조 단군의 뜻을 다시 상기하였다. 이처럼 숭고한 가치를 건국이념으로 삼은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또 있을까 싶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했다. 그 후로도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널리 쓰였다.
예로부터 함경도 지방 등에서는 음력 10월 3일에 단군 탄신일을 축하하는 ‘향산제(香山祭)’라는 이름의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존재하였으며, 여기서 개천절의 날짜가 기원하였다. 1909년 1월 15일 나철을 중심으로 대종교는 개천절을 경축일로 제정하고 매년 음력 10월 3일 행사를 거행하였다.
나철의 단군 숭봉과 민족교육으로 전개된 구국운동은 종교를 초월해 국내외 독립운동의 토양이 됐다. 개천절 기념식은 국내는 물론 상해 및 미주지역 동포들의 단합과 반일의식을 높이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1919년 4월 11일 설립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동년 11월 25일 첫 개천절 기념식을 거행하고, 1920년 1월 26일 ‘국무원 포고’ 제1호를 통해 “우리 대한(大韓) 나라는 성조 단군께옵서 억만년 무궁의 국기(國基)를 시작”했음을 천명했다. 이는 당시 단군을 한겨레의 시조로, 고조선을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보는 보편화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도 이어져 1948년 9월 25일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단군기원(檀君紀元), 즉 단기를 국가의 공식 연호로 법제화하였다. 이후 1949년 10월 1일에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천절이라고 이름 붙이기 이전부터 한민족은 10월을 상달(上月)이라 부르며, 한 해 농사를 추수하고 햇곡식으로 제상을 차려 감사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제천행사를 행하게 되는 10월을 가장 귀하게 여겼고, 3일의 3의 숫자를 길수(吉數)로 여겨 왔다는 사실은 개천절의 본래의 참뜻을 보다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날은 여러 단군숭모단체(檀君崇慕團體)들이 주체가 되어 마니산의 제천단, 태백산의 단군전, 그리고 사직단(社稷壇)의 백악전 등에서 경건한 제천의식을 올리고 있다.
앞서 이러한 제천의식은 고조선 멸망 후,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 행사는 물론이요, 마니산(摩尼山)의 제천단(祭天壇), 구월산의 삼성사(三聖祠), 평양의 숭령전(崇靈殿) 등에서 단군신앙을 이어나갔다.
● 역사적 사실인가! 신화인가?
단군은 제사장을 뜻하고, 왕검은 정치적 지배자를 뜻한다. 따라서, 단군왕검은 곧 제정일치 시대의 족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며 발전하였는데, 이 시기를 고조선이라 한다.
우리 역사상 가장 먼저 정치적 사회를 이룩한 고조선은 착실하게 발전하여, 중국 전국 7웅의 하나인 연(燕)과 대등한 세력을 형성하면서 점차 동방 사회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이 때, 고조선은 그 세력을 요서 지방까지 뻗쳐 만주 남서부 일대까지 그 세력권으로 하여 중국과 맞설 수 있었다.
고조선 사회에는 일찍이 8조 법이 있었다. 그 내용은,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 등 엄격한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원래 씨족 사회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법이었으나, 당시의 족장들은 그 엄한 법률로 사회 질서를 유지하면서 지배 세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천절과 단군 및 고조선은 그간 수많은 시련을 겪어왔다. 개천절을 우리나라 사학계에서 단군은 실존인물이고 고조선 건국을 기원전 2333년으로 인정하는 학자는 많지 않다. 단군과 고조선은 가공된 전설일 뿐이고 실제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에 의해서도 오랜 고초를 감내해야 했다.
이에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지배문화였던 불교문화와 고려 후기부터 근세조선을 지배했던 유가문화만이 우리 문화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과 통치자 단군왕검에 대해 의견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고조선’의 존재를 처음 쓴 이는 일연 대사(1206~89)였다. 그는 일생을 통해 자료를 수집해 70대에 ‘삼국유사’를 썼고, 여기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1894년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단군고(檀君考) 논문에서 불교 설화를 근거로 가공한 이야기라고 단군조선의 고조선 역사를 부정했다. 나카 미치요는 1894년과 1897년 ‘조선고사고’(朝鮮古史考) 논문에서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는 망설이며 날조된 신화라고 주장했다.
일본 학자들의 단군신화 연구는 실증사학이라는 방법론의 가면 아래 출발부터 제국주의적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본 학자들의 단군신화 연구 역시 그 목적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한국사 왜곡을 통해 한반도 통치의 정당성을 찾고자 하였다. 통칭 ‘식민사관’으로 통하는 역사작업 중 일제가 매우 중요하게 취급한 분야는 단군과 단군조선에 대한 역사 왜곡이었다.
일제는 ‘조선 역사가 일본 역사를 앞지를 수 없다’는 전제 하에 한국 고대사에서 고대 조선의 실존 역사를 곰과 호랑이가 나오는 신화로 해석하여 이를 가공의 역사인 설화로 왜곡했다.
단군과 관련된 일련의 이야기가 실제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구전되던 것이고, 고조선의 역사가 단군의 시기까지 소급된다면, 한국사 역사 왜곡작업의 첫 단추를 자기들 마음대로 끼울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강점 하에 있는 조선의 역사가 일본보다 더 오래되고 심오한 문화를 가져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 단절된 역사 복원 ‘본격 시동’
이제 우리는 숭고한 개천절과 개천정신을 바르게 알고 실천할 때가 되었다. 그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왜곡과 수난으로 심하게 훼손당한 개천의 건국이념을 올바르게 세워야 한다.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참된 뜻을 깨달아 우리의 대과업인 남북통일을 이루고 나아가 인류평화에 주역으로 힘차게 전진해야 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우리의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이는 일찍이 백범 김구 선생이 문화 국가 건설을 역설하면서 한 말이다. 백범 선생이 말씀한 대로, 21세기는 군사와 경제의 시대를 넘어 문화의 시대이다. 다행히 우리 겨레는 수천 년 역사를 통해 찬란한 문화적 자산을 풍부하게 쌓아 왔다. 그 소중한 자산을 계승하여 문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이제 우리 몫이다.
이에 심오한 우리 고대문화를 발굴하여 체계화하여 그것이 우리문화의 핵심에 서도록 하는 일은 매우 시급하고 중요하다. 그것은 과거로의 복귀나 배타적 국수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행복과 세계인의 발전적 미래를 위한 것이다.
그간 우리 학계는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고조선 역사를 적극 규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잃어버린 상고사를 되찾기 위해서는 국내에 남아 있는 일부 문헌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국내외 사료(史料)를 광범위하게 조사·연구해야만 한다.
2천여 년 가까이 존속했던 고대 조선 역사를 제대로 복원하지 않고 한국사의 기원을 고구려나 신라에서 찾는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한다. 사학계는 고대 조선 건국과 그 역사적 실재성에 대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계속 발굴하여 새롭게 정리해 나갈 대과업에 적극 앞장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