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17회)

● 성광의 앞날에 비로소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 작가 朴又木

고이 장군을 호위한 병사들이 성벽을 넘어 산을 달려 내려갈 무렵에서야 혼절에서 깨어난 경비병들이 한참을 우왕좌왕 수색을 벌였다. 그러고는 뇌옥 방 잠금 쇠가 뜯긴 것을 발견하고는 비로소 포로가 탈출한 것을 알아차렸다.

경비병 우두머리가 그를 결박해 상관한테 끌고 갔다. 간이 오그라든 상관이 성주에게 적장 포로가 탈출했음을 고했다. 성주가 서둘러 이사금(尼師今, 임금)이 머물고 있는 파오包(천막 식 임시가옥)로 달려갔다.

성주가 대죄하여 이사금에게 고했다.

“침수 드신 침전을 어지럽혀 송구하나이다. 소신들의 불찰로 적장 고이가 탈출하였나이다.”

“신라군 야습으로 성문이라도 뚫렸단 말이오?”

“아니옵니다. 적군 몇 명이 잠입해 탈옥시켰다 하옵니다.”

“무어라, 적군 몇에게 파옥이 되다니 듣기조차 민망하오.”

“성곽 방비를 소홀히 하여 반드시 지켜야할 포로를 놓쳐 성려를 끼친 신들의 죄를 벌하여 주소서.”

“승전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더는 기강이 해이되지 않도록 하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하온데 이상한 일이 있었나이다.”

“이상하다니 그게 무엇이오?”

“잠입한 적군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도망치지 않고 뇌옥에서 잡혔다 하옵니다.”

“그것 참 해괴하도다. 그자를 데려오라.”

성주가 손짓하자 부하가 결박 진 성광을 끌고 들어와 탑전에 꿇렸다.

“네가 왕제인 고이를 탈출시킨 백제군이냐?”

“그러하옵니다.”

“어찌하여 탈출하지 않고 뇌옥에 남아 있었느냐?”

“저의 장군께서 무사히 성을 벗어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고 또 한 편으로는 신라 이사금께 예의를 갖추고자 해서였나이다.”

“네가 상전의 구명을 위해 죽을 각오로 사지에 남은 것은 가상하다 이해가 되나 짐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함이란 말은 무슨 요망한 소리란 말이냐?”

“아무리 적국이라 하나 이사금께서는 만백성의 어버이이신 천자이시거늘 어찌 소인 같은 비천한 몸이 요언으로 탑전을 더럽히리까.”

“네 말에 진정이 엿보이니 그 연유를 말해보라.”

“소인은 이번 탈주의 성공으로 저의 어라하와 신라 이사금께서 잃은 것에 비해 얻으신 것이 더 크다고 믿고 있나이다. 저의 어라하께서는 패전에서 당한 수치에 골육까지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하셨으나 철통같은 적군 심장부에서 포로를 탈출시켜 적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셨으니 능히 패전의 수치를 씻고 적군에게 작은 밀사(密事, 남이 모르게 하는 일)로 커다란 경종을 울렸으니 크게 얻은 것이 되올 것입니다.”

“허, 네 말에 일리가 있구나. 계속하라.

“이사금께서는 이미 승전하시어 백제 어라하께 수치를 안기셨고 적군의 선봉장을 포로로 잡아 백제군의 치욕을 삼아 양군에 위엄을 떨치셨으니 큰 전과를 올리셨는데 고이 장군께서 탈출하심으로써 두 가지 더 큰 것을 얻으셨나이다.”

“무엇을 얻었다 하느냐?”

하나는 포로가 된 적장의 목을 베지 않으시고 결과적으로 살아 돌아가게 만드셨으니 만방에 관대함을 보이셔서 성군의 칭송을 들으신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백제의 왕제를 죽임으로써 구적(仇敵)이 되는 비극을 피하신 것입니다.”

“일개 말단시위인 네 언변에 어질고 사리에 밝음이 넘치다니 백제 어라하는 복도 많도다. 그래 너는 이번 전쟁을 어떻게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외람되오나 소인이 감히 판단컨대 이번 전쟁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을 것으로 사료되나이다.”

“네가 정녕 나의 의지까지를 읽었다는 말이냐?”

“저희 구드레께서는 지난해 모산성에서의 패전을 설욕하러 이번에 거병하신 것이오니 개전에서 패한 것으로 출병한 목적은 판가름이 난 것이므로 국운을 걸고 싸움을 계속할 명분이 없나이다. 또한 이사금께옵서는 이미 승전하여 기선을 제압하셨으니 적군이 물러갈 양이면 못이기는 체 회군하실 일이지 이득도 없는 전장에 발이 묶여 왜구의 침탈이 잦은 서라벌을 마냥 비워두실 리가 없다고 보았나이다.”

“허어. 그대 말대로라면 짐은 당장 내일 회군해야 하질 않느냐?”

“대저 제왕의 선정으로 성취하는 모든 것들, 이를테면 부귀영화나 백성의 유족한 삶이나 고대광실이나 준마나 전장의 승리 같은 좋은 것, 영광스러운 것, 자랑스러운 것들이 다 변하고 사라져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나이다. 그것은 비정한 병과로도 없앨 수 없고 제왕의 패권으로도 끊을 수 없는 혈맥이나이다.

그 혈맥에 구적의 한을 심으면 그것을 끊어 없앨 자는 세상에 없나이다. 영명하신 신라의 이사금께서 이 하찮은 구양성에서 진정 백제의 구드레와 영원한 구적이 되려 하시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나이다.

한쪽의 승리는 상대편의 패전이므로 전쟁은 반드시 어느 한쪽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원한을 심게 되나이다. 또 그 숙원宿怨은 대물림으로 혈맥을 타고 흘러서 후대에서 복수전을 벌이게 만듦으로써 병과를 끊이지 않게 만들어 백성을 도탄에 빠트리고 결국엔 사속(嗣續, 대를 이어감)을 위태롭게 만드나이다. 통촉하소서.”

“그대가 짐을 깨우쳤도다. 바라건대 그대의 구드레도 출병을 후회하고 회군하기를 바라노라.”

“소인이 감히 성지를 엿보는 불경을 저질렀나이다. 어차피 죽을 몸이 양국이 구적이 되는 것이 안타까워 사뢴 것이오니 부디 괘념하시옵소서.”

“짐이 영명한 이사금이란 소릴 들었거늘 어찌 그대 같은 인재를 죽이는 패도의 어리석음을 범하겠는가. 그대는 돌아가서 그 충성으로 구드레를 섬겨 다시는 전장에서 부딪히지 않게 진력하라.”

“성은이 하해와 같나이다. 부디 옥체 보존하시어 돌아가소서.”

성광이 풀려나 백제 진영으로 돌아왔다. 왕이 그를 탑전으로 불러 위로하고 치하했다. 고이 왕제는 그를 생명을 구해준 은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어떡해서든 장차 자신의 고굉지신(股肱之臣)으로 삼을 것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백제군은 그의 예측대로 회군했으며 이어 신라군도 서라벌로 구양성을 떠났다. 실로 진정한 용기가 있는 한 약관의 희생을 각오한 충심의 발로가 수많은 생명을 구하고 두 나라가 비극적인 구적이 되는 것을 막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때 겨우 20대 초반의 약관인 성광의 앞날에 비로소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