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디로 가시는데요? 바람 따라 갈란다.’

▲ 수필가 맹난자

구름 같은 벚꽃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바라보는 망(望) 팔십의 나이, 생이 가볍지만은 않다. 오늘 산책길에서 만난, 목이 댕강 잘린 동백꽃은 마치 처형된 선사의 모습을 뵙는 듯했다.

“저 칼이 내 목을 친다 해도/ 봄바람을 가르는 것과 다름없어라.

이 몸은 내가 아니요(四大非我有)/ 오온은 본래 공하기(五蘊本來空) 때문이다.”

중국 승조(僧肇, 384~413) 스님의 임종게가 떠올랐다. 그분은 왕이 명령한 재상직을 수락하지 않아 끝내 처형되었다. 오온무아(五蘊無我)를 그대로 우리에게 일러준다.

저 바람에 떨어지는 꽃처럼 나 또한 미구에 그렇게 소멸될 것을 예감한다. 그동안 알려고 애썼던 객체로서의 죽음이 어느새 산그늘처럼 다가와 내 몸에서 해체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잇몸도 주저앉고 매일 어딘가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시체놀이’를 즐기던 일본작가 엔도 슈사쿠처럼 나도 어느 날은 눈을 뜨지 못하는 상태로 누워있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몸에 힘을 빼고 요를 ‘들판’이라 생각하며 반듯이 누워 호흡을 참아보기도 한다. 살갗에 닿는 바람 그리고 햇볕이 느껴진다.

등을 떠받치고 있는 융단처럼 폭신한 흙, 언젠가는 포슬한 저 흙속으로 동화되고 말 감촉조차 심상에 그려지는 것이다. 가족묘원에 마련된 한 뼘 내 공간에 그렇게 누워본다.

나는 가끔 유령인간처럼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있어 볼 때가 많다. 내가 정말 있기나 한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끌어모아서 얽어맨 한 칸의 초가집처럼 사실은 짚단과 나무 기둥의 비실체적인 몇 가지 요소들에 지나지 않는 임시적 존재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승조 스님의 말씀처럼 지수화풍〔四大〕 네 요소에 원래 ‘나’라는 존재는 없고 몸과 마음〔五蘊〕에도 실체가 없는 것을. 나를 포함한 일체의 현상은 원인과 조건으로 연기 緣起 된 것이기에 그 실체는 없다.

숱하게 들었던 법문에 의하면 본질적으로는 공(空)이다. 실체가 없으므로 연기(緣起)가 가능하며 자성(自性)이 없는고로 공(空)이고 무아(無我)이다. 이렇게 ‘내가 없다.’고 생각하니 겨눌만한 그 무엇도 세상에는 없는 것 같다. 마음이 이내 텅 빈 듯 허허로워진다.

바람에 자꾸만 꽃이 지고 있다. ‘바람’처럼 떠나가신 경허 스님(鏡虛, 1849~1912)의 모습이 떠오른다.

서른한 살에 자성본원(自性本源)을 깨친 스님은 가는 곳마다 무애(無碍) 법문을 펼쳤고, 움직일 때마다 수많은 일화가 뒤따랐다. 그분은 산수갑산에서 승복을 벗어 던지고 토굴을 지어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예순세 살이 되던 어느 봄날이었다. 스님은 아이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내일 가야겠다.”

“어디로 가시는데요?”

“바람 따라 갈 뿐이란다.”

▲ 동백꽃이 지는 모습

그리고는 붓으로 일원상(一圓像)을 그린 뒤,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누워 원적(圓寂)에 들었다. 하나의 원상〔〇〕이라는 방편에 의지하여 무언의 실상(實相)을 드러낸 것이리라.

“동그라미〔道〕는 허공과 같아 부족함도 넘침도 없다(圓同太虛 無欠無 餘).”고 한 옛사람의 말씀이 떠오른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일원상,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그 본체를 노자(老子)는 ‘도(道)’라 칭하고, 유가에서는 ‘태극’으로, 불가에서는 청정하고도 공적(空寂)한 ‘법계(法界)’로 상정했다.

빈 허공에 서린 하나의 기운, 경허 스님께서는 문자(文字)의 속성을 벗어난 원상〔〇〕으로서 다르마〔法〕, 즉 연기(緣起)의 소식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요즘 들어 ‘바람 따라 갈 뿐’이라던 그분의 모습이 왠지 사무쳐 온다. 입에 붙는 바람, 바람. 산수갑산의 4월, 그분은 바람 따라 어디로 가셨을까?

우주라는 무대를 인연 따라 흐를 뿐, 인연의 장(場) 어디에도 실체적인 ‘나’라는 존재는 없다. 늘그막에 이르러 무아(無我)를 참구하며, 이제야 남루한 내 탐심을 조금씩 내려놓는다.

앉은키도 어느새 줄고 짧은 그림자에 시나브로 꽃이 지는데.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던 시인 조지훈의 심정도 가깝게 느껴진다. 지상에 꽃잔치가 한창인 이 봄, 현기증처럼 나는 잠시 우주의 미아(迷兒)가 된 듯하다.

‘어디로 가시는데요?’ ‘바람 따라 갈란다.’ 혼자 문답놀이를 하는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 프로필

- 《수필공원》(현《에세이문학》) 1996년 여름호로 추천완료.

- 월간 《신행불교》 편집장, 《에세이문학》 발행인, 한국수필문학진흥회장 역임.

- 현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자문위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고문, 《The 수필》 선정위원

- 수필집 《빈 배에 가득한 달빛》, 《주역에게 길을 묻다》

《그들 앞에 서면 내 영혼에 불이 켜진다》1·2권, 《본래 그 자리》, 《시간의 강가에서》 외

- 현대수필문학상. 신곡문학대상. 조경희문학상 대상. 현대수필문학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