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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曜 隨筆> 수필가 김덕임 ‘큰언니’
“지천명…몸과 마음을 곡진히 모은다”
기사입력  2020/11/08 [15:07] 최종편집    수필가 김덕임

나이 쉰에 속절없이 무너진 그녀

 

▲ 수필가 김덕임   

나이 쉰에 속절없이 무너진 그녀였다. 팔 남매 자녀들을 고달픈 가지에 다문다문 매달고.

 

세상은 온통 코로나19 바이러스로 갈피를 잡지 못 하지만 봄날은 여전히 왔다. 뒷산 휘파람새의 연둣빛 노래가 대상포진 후유증으로 물먹은 솜 같은 몸을 불러낸다.

 

미스터트롯 경연에서 불렀던 가수 임영웅의 휘파람 소리보다 더 감칠맛 난다. 소쿠리 같은 뒷산으로 몇 걸음 들었을 뿐인데 우주의 입김 속에 든 듯, 세상 소음 멀어지고 시끄러운 마음 조용해진다.

 

걷기는 마음뿐 아니라 공간까지도 적멸의 기쁨으로 바꿔주는 마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영혼의 무게까지도 느낄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이라더니 용인의 산에는 크고 작은 산소가 많다. 이 말의 원래 뜻은 그게 아닌데도 사람들은 굳이 사거용인에 방점을 두는 듯하다.

 

이 말 속에는 조선시대 어느 여인과 그녀의 효자 아들 형제에 대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용인에 살던 한 여인이 아들 하나를 낳고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고단한 생활 속에서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충북 진천으로 재가했고, 거기서도 아들을 낳았다.

 

씨가 다른 용인과 진천의 두 아들은 어머니를 서로 모시려고 다투었다. 그러다가 두 아들은 어머니 살아 생전엔 진천의 아들이 모시고, 사후에는 용인의 아들이 용인 땅에 봉분을 짓고 정성껏 돌보기로 했다는 이야기다. 자식들이 부모 섬기는 일을 서로 미루는 요즘 세태에선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사는 봉무리 마을 뒷산은 해발 100여 미터 안팎으로 나지막하다. 능선을 따라 오솔길을 걷다 보면 양지바른 곳에 많은 무덤이 삶의 마침표처럼 점점이 박혀 있다. 그 속에서 한 줌 흙으로 변한 고인들의 성분은 다 같을 것인데, 묘비에 새긴 이름은 제각각이다.

 

죽은 자가 흙에 들며 겨우 이룬 깃털 같은 무소유 위에, 산 자들의 입맛대로 꾸역꾸역 올려놓은 소유의 표지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만치 묘역 가장자리에 산벚꽃이 솔바람에 하늘거린다. 흡사 어릴 적에 장다리 꽃밭에 너울거리던 배추흰나비떼 같다. 연한 장다리 줄기의 달차근하던 맛도 세월을 넘어 희미해진 미각을 건드린다. 제법 짱짱한 가문의 묘역인 듯, 널찍한 산자락 하나를 모두 차지했다.

 

지난 가을에 본 광경이 놀라웠다. 그 묘역 주변을 다듬는데, 포클레인은 가장자리의 크고 작은 나무들을 사정없이 밀어젖혔다.

 

늦가을, 잎을 떨군 나무들은 한 해의 삶을 또 한 줄의 나이테로 그리다가 패잔병처럼 푹푹 쓰러졌다. 무법자의 습격에 이유도 모른 채 한순간에 영토를 빼앗긴 것이다. 마치 청교도들에게 보금자리를 빼앗긴 인디언들처럼.

 

새봄이 돌아온 지금까지도 갈참나무와 오리목, 산벚나무들이 뿌리째 뽑히고 옆구리가 찢기고 우듬지는 부러진 채 누워 있다. 미처 피할 수도 없이 당한 그날의 참혹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차라리 톱으로 깔끔하게 베어냈으면 좋으련만, 멀쩡한 나무들을 통째로 밀어 넘긴 채 묘역만 비켜서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쓰러진 나무 정령들의 처절한 흐느낌이 능선까지 따라온다.

 

그 쓰러진 나무들 틈에서 산벚나무 한 그루가 살아 있었다. 한국전쟁 때 시체가 산처럼 쌓인 전장에서 전우의 시신 밑에 엎드려 목숨을 건졌다는 사촌 오빠 같다. 넘어진 산벚나무의 밑동은 장정의 팔뚝만 하다.

 

스무 살은 좋이 되었을 것 같다. 사람 같으면 한참 청년 때가 아닌가. 옴싹 뽑혔는데 잔뿌리 두엇이 황토 속에 아슬아슬하게 묻혀 있었다. 두 가닥 뿌리를 덮은 모성 같은 흙의 온기로 숨을 간신히 잇대어 온 것이다.

 

자연은 경박스런 인간과는 다르다. 환경 탓을 하지 않는다. 잠시 있을 뿐인 생명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공을 지극히 들인다. 그래서 이 작은 벚꽃잎 하나에도 소우주의 비밀이 내재하는 것일까?

 

산벚나무는 누워버렸지만, 천지 분간 못 하는 어린 가지들을 위해서 밑동은 얼마나 간절히 빌었을까. 죽어가는 어미의 간구를 들어준 듯, 쓰러진 가지는 곧게 서 있는 다른 나무들보다 더 많은 꽃등을 달았다. 온 산이 환하다. 꽃들은 어쩌면 젊은 산벚나무의 마지막 혼백인지도 모르겠다.

 

둥치도 가지도 불치병 든 큰언니처럼 몸을 부렸지만, 꽃송이는 더욱 생광스럽다. 흰나비 같은 벚꽃들이 소곤거린다. “엄마, 누워 있어도 괜찮으니 걍 숨만 멈추지 마세요.”

 

▲ 산벚나무는 누워버렸지만, 천지 분간 못 하는 어린 가지들을 위해서 밑동은 얼마나 간절히 빌었을까. 죽어가는 어미의 간구를 들어준 듯, 쓰러진 가지는 곧게 서 있는 다른 나무들보다 더 많은 꽃등을 달았다   

 

팔 남매 뒷바라지 일개미처럼

 

육 남매 중 맏이였던 큰언니는 막내인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앞산 너머 동네로 시집을 갔다. 그녀는 청양고추같이 매운 시집살이를 하며 일제 점령기와 한국전쟁 등 모진 세월을 살아냈다.

 

거기에 주야장천 밀주 병을 끼고 사는 남편 시중까지 들어야 했으니 그 삶이 오죽했을까. 그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수행의 길이었으리라.

 

한 철 살다 가는 매미 같은 인생인데, 나무 그늘에서 노래 한 번 목청껏 불러보지 못한 큰언니. 팔 남매 뒷바라지에 일개미처럼 낮도 밤도 없던 큰언니는 지천명을 앞두고 짚불처럼 스러져 갔다.

 

제삿날이면 조카들이 큰언니의 젯상 앞에 몸과 마음을 곡진히 모은다. 쓰러진 산벚나무 가지지만, 하얗게 핀 꽃들이 참으로 야젓하다. 일본의 이큐선사(一休禪師)의 시가 떠오른다.

 

벚나무 가지를 / 부러뜨려 봐도/ 그 속엔 벚꽃이 없네./ 그러나 보라. 봄이 되면/ 얼마나 많은/ 벚꽃이 피는가.

 

 

김덕임 : 2010년 문예춘추 수필 등단.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경인문예 편집위원. 수필집 / ‘심껏 살다 보면 좋은 끝이 올 겨’ ‘운 좋은 방아깨비kdn02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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