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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曜 隨筆> 수필가 정선모 ‘궁극(窮極)의 공간’
기사입력  2020/10/24 [10:52] 최종편집    수필가 정선모

 

▲ 청희당은 경남 하동군 북천면 이명골에 살포시 온유한 자태를 드러낸다.

 

 

위대한 유산청희당(淸喜堂)

 

기둥과 기둥을 세우고, 땅과 천장을 막아 인위적인 공간을 만들면서부터 건축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찬바람 피하고, 비를 막아줄 안온한 공간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로부터 시작된 건축이 인류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만들어낸 반면에 공간에 대한, 집에 대한 끝없는 집착과 탐욕이 지금의 거대한 도시를 형성했을 것이다.

 

숨 쉴 틈조차 없이 빽빽이 늘어선 아파트 숲을 보며 얼마 전에 다녀온 청희당(淸喜堂)을 생각한다. 지인인 M 교수가 부모님의 남달랐던 가정교육에 대해 글을 쓰는데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고향에 같이 갈 수 있겠냐는 제의를 해왔다. 그분은 부모님이 남기신 정신을 위대한 유산이라고 표현했다. 존경과 애정이 가득 담긴 위대한 유산이라는 낱말에 이끌려 동행하게 된 것이다.

 

꿈속에서 본 듯 아련한 그곳은 한적한 시골마을에 있었다. 청희당은 경남 하동군 북천면 이명골에 살포시 온유한 자태를 드러낸다. 지리산 자락 그 너른 품이 풀어 내린 작은 마을에서 그 집을 처음 보았을 땐 약간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기와지붕 아래에 서양의 신전처럼 하얀 기둥이 몇 개 늘어서 있고, 처마 밑에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마치 마루처럼 너른 평상이 거실 폭만큼 놓여 있어 흔히 볼 수 없는 형태의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집을 찬찬히 살펴볼수록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 집의 건축을 의뢰한 사람은 바로 아버지라 했다.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며 추억을 쌓았던 곳,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영원히 머물고 싶은 터 위에 건축가인 아들에게 부탁하여 집을 지었다. 평상에 앉아 바라다보면 건너편에 물결치듯 오르락내리락 하는 산마루의 선()이 아름답게 중첩되어 흐르고, 그 선을 따라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다 보면 남해에 이른다고 했다.

 

내밀한 가족의 역사는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뒷마당에 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아들은 붉은 벽돌로 뒤꼍에 아담한 높이의 담장을 둘러 남다른 공간을 만들어냈다.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하고 가족들만의 이야기가 담긴 신성한 공간으로 탄생한 그곳은 일종의 사당이었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이 주택의 가장 신성한 공간으로 사당(家廟)을 두었듯이, 이 집도 현대적으로 해석한 신성한 공간을 만든 것이다. 집안을 향해서도 반달 모양으로 둥글게 파서 데크를 놓았고, 조명을 설치하여 신비로움을 더했다. 이 뒷마당의 이름을 궁극의 (사이)’이라 이름 짓고, 현판도 달았다.

 

자수성가 부친소원이룬듯

 

태초에 혼돈에서 하늘과 땅이 열리고, 그 사이에서 인간이 태어났다.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인 인간은 땅을 다스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때가 되면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 그 궁극의 사이를 지금 내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한유한 시골마을에서 다분히 철학적 의미가 내포된 궁극의 원리를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내 걸음으로 대여섯 걸음 정도 될 작은 공간을 보니 건축가는 이미 신()의 마음을 읽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 공간의 중심에 부모님의 흉상(胸像)을 세웠다. 흉상은 지붕을 벗어나 하늘 향해 뚫려있는 빈 공간에 세워 하늘의 기운이 내려와 이 마당에 머무르게 했다. 건물의 내부는 일반 집처럼 설계하여 자손들이 살 수 있게 했고, 영혼이 되어 다시 내려온 그 존재는 그곳에서 자손들을 만난다.

 

흉상이 바라보는 시선은 멀리 마주 보이는 산봉우리를 향하며, 결국은 궁극에 닿아 다시 하늘로 귀의한다. 삶과 죽음에 경계가 없다는 것을 이 작은 공간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연스럽게 영과 육이 만났다 바람처럼 흘러가는 장소를 이처럼 명징하게 보여주는 곳이 또 있을까 싶다.

 

건축이 시작되자 평생 원하던 꿈이 이루어지고 있다며 아버지는 무척 기뻐하셨다고 한다. 빈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온갖 고생 끝에 자수성가하여 그 지역의 명문가로 이름을 날린 아버지를 위한 집을 짓기 위해 아들은 온 정성을 다했을 것이다.

 

명문가란 7남매를 비롯하여 십여 명의 손주들까지 누구 하나 빠짐없이 훌륭하게 키워냈기에 들을 수 있는 칭송 아니던가. 아낌없이 나누며 살아온 부모님처럼 그 지역 곳곳에서 자손들의 선행과 미담이 끊이질 않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하고 들른 곳이어서 더 뜻깊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한창 공사가 진행되던 어느 날, 아버지의 생신을 맞아 건물만 덩그러니 완성된 상태에서 동네 주민들과 어울려 소박한 잔치를 열었단다. 병환 중이었는데도 무척 기뻐하던 그날의 아버지 모습을 잊을 수 없다며 아들은 눈시울을 적신다.

 

건물이 완공된 지 보름 후 이 집의 건축주는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언제든 돌아올 곳이 있기에 가볍게 육신의 옷을 벗었을 아버지를 위한 집이 지금은 모든 자손들이 사랑하는 공간이 되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공간이 탄생한 그간의 이야기를 건축가에게 직접 듣고 있노라니 절로 옷깃이 여미어진다. 집이란 이처럼 가족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있어야 하는 것을. 살아서 거주하고,

 

이승을 떠나면 영혼까지도 자손과 함께 머물 수 있는 곳, 대대손손 그 집안만의 정신이 전해 내려오는 곳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땅이든 집이든 그것을 이용하여 재산을 불리는 데만 온통 관심 있는 현대인들에게 집의 가치와 그 의미를 제대로 일깨워준 곳이었다.

 

두 손을 모으고 손안을 한껏 벌리면 그 안에 길쭉하게 타원형의 공간이 생긴다. ‘궁극의 간은 그러한 형태다. 마치 기도하는 어머니의 손 같다. 뒷마당의 담장은 크게 두 팔 벌린 형태다, 그 선을 이으면 앞마당까지 이어져 결국 집과 정원이 모두 한울타리에 담긴다. 곡선으로 이어진 울타리가 마당과 집을 품듯 한껏 벌려 안은 그 품안에 모든 자손들을 품어 안는다.

 

세찬 비바람이 불어도 피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품은 아버지를 연상하게 한다. 결국 그 집은 어버이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래서 그 집 마당에 들어서기만 해도 그토록 편안한 느낌이 들었나 보다. 이 세상에 어버이 품만큼 푸근하고 아늑한 곳이 또 어디 있을까.

 

지금은 별장처럼 사용하여 평소에는 조용하기 그지없지만, 타지에 살던 자손들이 고향에 오면 서로 이곳에 묵으려고 할 만큼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삶에 지치거나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언제든 들러 한참씩 쉬었다 간다는 건축가 아들은 이곳에만 오면 위안을 받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했다.

 

▲ 도서출판SUN 대표, 수필가  

가끔 친구들도 놀러 오는데 거실에서 담소를 나누다가도 자신들을 바라보는 흉상의 시선이 느껴져 언행을 절로 삼가게 된다고 한다. 이 집을 지으며 술도 담배도 모두 끊었다는 건축가의 표정이 지리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맑다.

 

그의 배려로 지극한 효심이 만들어낸 청희당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알 수 없는 향기로움이 집안 가득 맴돈다. 이곳은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영원의 공간이며, 자연과 인간이 이루어낸 균형과 조화를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집이다.

 

선한 마음을 가보로 물려준 조상과 그 뜻을 이어받은 자손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공간이다. 한 가문이 오랜 세월 공들여 피워낸 귀하디귀한 꽃 한 송이 보고 온 듯, 다녀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곳을 생각하면 여전히 향기로움에 휩싸인다.

 

프로필

도서출판SUN 대표, 수필가

한국액티브시니어협회 부회장

핸드폰책쓰기코칭협회 부회장

한강문학작가회 회장

수필집: <바람의 선물>, <너를 위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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